36. 세번째 에피소드와 김일성에게 남긴 편지

세 번째 에피소드: 설탕 훔쳐 먹고 영창가다
남한 사람들도 군대생활 할 때에 춥고, 배고프고, 졸리고 그런다고 하는데 나도 군대생활 할 때 그렇게 배가 고팠다.
당시 부식이 괜찮은 편인데도 훈련 나가면 무 다 캐고 남은 밭에 남은 조그만 무들을 서로 먹겠다고 싸우고 했다.
어떤 놈들은 배식할 때에 식기를 모자로 덮어서 두 그릇씩 타먹는 약삭빠른 놈들도 있었다.
공병대 근무할 때 설탕을 훔쳐먹고 영창에 간 일이 있다.
김종환이라는 친한 동기생과 군단 식량창고에서 보초를 설 때였다.
한참 배고플 때에 식량창고 앞을 지키는 보초로서 창고 속에 쌓여 있는 맛있는 것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왜 없겠는가.
더욱이 사탕가루는 맛보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래서 둘이서 사탕가루를 훔쳐먹기로 계획을 했다.
초저녁에는 병사들이 잠이 안 들어 들킬 수 있으니까 밤 12시 지나서 쿨쿨 잘 때 사탕가루를 좀 훔쳐 먹기로 했다. – 설탕을 북한에서는 사탕가루라고 한다 –
북한은 사탕가루가 영 귀했다.
마침 밤 12시부터 2시까지 근무시간이 되어 둘이서 사탕가루 훔쳐먹기 실행에 들어갔다.
먼저 사람들이 없나 주위를 살피고 창고 문 자물쇠를 돌로 쳤다.
사슬로 엮어 놓은 자물쇠가 풀리면서 열렸다.
문을 열고 창고로 들어가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는 사탕가루 포대 앞으로 걸어갔다.
한 포대에 80키로 짜리다.
아시보 총 총창(아시보 총에 대검처럼 꼽는 것)을 뽑아서 사탕자루를 푹 찍자 총창으로 사탕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칼로 베면 자국이 나서 들킬 수 있지만 총창으로 빼 먹으면 구멍만 나니까 거기는 쉽게 흔적을 지울 수 있다.
80키로 포대에서 조금 뽑아 먹는 것이므로 들키지 않는다.
쏟아져 나오는 사탕가루를 각자 화이바(군인 철모)에다 양껏 받아서 실컷 먹었다.
그렇게 달고 맛있는 것이지만 먹는 것도 한계가 있지 절반도 채 못 먹고는 질렸다.
질리도록 먹고서 근무교대 시간이 되어서 내일 먹을 생각으로 풀밭에 신문을 펴놓고 쏟아 붓고는 신문을 접어서 그 위에 돌로 꽉 눌러놓았다.
그런데 그 이튿날 공교롭게도 소동이 난 것이다.
내무반으로 뱀이 들어온다고 병사들이 풀베기를 했는데 풀베기를 하다가 사탕가루가 신문에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누가 이랬나?” 하고 찾았으나 아무도 했다는 놈이 없으니까 그 전날 보초를 선 병사들을 찾았고, 우리 둘을 붙잡아놓고 따지는데 말 안할 수 없어서 둘이 했다고 자백했다.
그랬더니 “누가 주도자냐?” 해서 내가 먼저 훔쳐먹자고 고안을 내놓았으니까 나는 3일간 영창에 가고, 김종환이는 변솟간 청소 3일 하는 벌을 받았다.
영창에 들어가니 돼지우리처럼 돌로 쌓아서 만들었는데 흙을 바르고 겨울에도 춥지 않게 해놓았다.
바닥에는 보릿짚을 깔아놓았다.
이불이나 담요 이런 것 없다. 마침 그때는 여름이라 춥지도 않지 거기서 실컷 잠을 잘 수 있어 좋았다.
졸병이라 늘 잠이 딸렸는데 사흘 동안 실컷 자고 잘 먹었던 것이다.
사흘 후 영창에서 나와서 공병대대장으로부터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훈시를 받았다.
그때는 나이도 19살이라 어렸고, 군대에서 배고프니까 그 정도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다들 생각해서, 그걸로 말미암아 특별히 불이익을 받은 것은 없다.
글을 마치면서
지금까지 북한을 탈출하여 이곳 남한에 정착해서 살아온 이야기를 35회 연재하였다.
많은 분들이 재미있게 읽었다고 하니 구세주님께 조금은 빚을 갚은 것 같다.
승리제단에 입문하여 10년이 넘도록 제단을 위해 한 일이 별로 없는데 그나마 나의 변변치 않은 이야기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하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난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군대 입대하여 훈련병시절 키가 작아 소총을 질질 끌고 다니는 것을 본 교육관이 불쌍하게 보았는지 운전학교로 보내서 운전병이 되었고, 신병 훈련 후 공병대에 배치되어 운전병으로 근무하다가 운수중대로 파견을 나가서 제일 졸병인데 우연히 엔진성능이 좋은 트럭을 배당받은 것도 그렇고, 트럭이 좋다보니 당연히 일을 잘하는 것처럼 보여 사단장한테 선택되어 사단장 차를 몰게 된 것도 그렇다.
또한 사단장 부인이 나를 잘 봐줘서 대학을 보내주었고 – 북한에서는 간부 자제가 되어야 대학을 갈 수 있다 –
청진의과대학 때에는 인품 좋고 실력 있는 지도교수를 만나서 내과 의사를 하게 된 것도 그렇고, 동생이 반동분자로 몰려 총살을 받기 전까지는 성분이 좋은 빨갱이로서 국기훈3급훈장도 두세 번 받은 것도 그렇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북한을 탈출하여 배타고 올 때 대한해협에서 폭풍을 만나 전복되어 죽지 않고 살아서 온 것도 그렇고, 그때 파도와 싸우다가 졸도하였는데 다시 깨어난 것도 그렇다.
나중에 알아보니 심방세동(심장박동이 정상보다 빠르거나 늦은 것)이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이곳 한국에 와서 자유를 누리며 배부르게 먹고 살았다.
애들도 장성하여 결혼하였고, 처남들도 국가에서 마련해준 직장을 잘 다니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어머니도 행복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고, 우리 내외도 경기도 광주에서 잘 살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여러모로 잘 돌봐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북한을 떠나올 때 김일성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써서 내 책상위에 두고 왔다.
인민의 낙원이라고 선전하는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과 비명에 간 동생 이야기도 썼다.
그때 나이 49살이었는데 벌써 28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났으니 감회가 새롭다.
나의 탈북으로 말미암아 많은 분들이 용기를 내어 탈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지금도 탈북 동포들로부터 많이 듣고 있다.
북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어서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고향 가맛골과 청진이 눈앞에 선하다.
승리제단 식구들을 비롯하여 나의 이야기를 애독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