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의 아버지 김정규, 그리고 씨앗

가맛골과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한 뒤 탈출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되겠다.
부친 김정규(金正奎)는 1901년생으로 일본 모 대학에서 치과를 졸업한 치과의사이다.
충청도 강경 출신으로 그곳에서 치과의사를 했는데 1920년대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립군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다가 일본군들의 추격을 받아 독립군들을 따라 만주로 들어갔다. 만주에서도 치과를 하면서 독립운동 자금과 식량을 대주다가 일본군들의 추격을 피해 북한으로 건너오셔서 오지 산골로 들어가셨다.
이러한 항일경력이 인정되어 우리 집안은 성분이 좋은 편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일본놈들을 피해 들어온 우리 조선 사람들 3가구가 화전을 일구어 살고 있었다. 가맛골(거기 사람들은 가맷골이라고 했다)은 종성읍까지 나오려면 아침 일찍 떠나서도 밤늦게야 도착할 정도의 오지 중의 오지였고, 달구지 길조차 없었다.
부친은 그곳에 들어와서 짐승을 잡어서 동네 사람들과 식량을 바꾸어 먹고 살았다.
부친께서는 독립운동 할 때에는 총을 쏴 본 적이 없었는데 그곳에 와서 먹고 살려니까 독립군들에게서 얻은 사냥총으로 사냥을 했는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는지 명포수였다고 한다.
부친은 가맛골에서 리더 역할을 했던 거로 보인다. 가맛골은 산골 오지라 눈이 많이 오는데 부친이 그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곳 주민들은 오두막집을 지어 살았다.
부친은 독립군들을 따라다니면서 독립군들이 귀틀집을 지어 사는 것을 보았으므로 그곳에서 귀틀집을 짓고 살았다. 귀틀집은 통나무를 세로 15센티미터, 가로 10미터 이상으로 잘라서 돼지우리 짓듯이 얽은 뒤에 빈 곳에 흙을 넣어 짓는다.
지붕은 새를 베어서 이엉을 얹어서 집을 지었다. 부친은 동네사람들에게 귀틀집 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가맛골에서 맞은 첫 겨울에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집에 갇혀서 겨우 내내 꼼짝 못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 사는 동포들은 눈이 오면 그대로 갇혀서 계속 살아왔다고 했다.
눈이 올 때는 한 1미터 씩 오는데 눈이 녹지 않고 계속 쌓이고, 눈보라가 치면 오목한 데 눈이 약 4-5미터 쌓인다.
그 경험 때문에 혼이 난 뒤로 눈 오기 전 가을에 집과 집 사이에 말뚝을 박아서 옆집과 밧줄을 매고, 화장실, 우물 등 가야 될 곳과 연결시키고 눈이 왔을 때 그 밧줄을 돌려서 굴처럼 만들어서 사용했다.
어떨 때는 눈높이가 10미터도 넘을 때도 있는데 겨우내 그 눈 속에서 살다가 사냥할 때만 눈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어두우니까 짐승 잡은 기름을 짜서 그걸로 불을 켰다. 부친이 거기에 와서 산짐승을 잡기 전에는 짐승 기름이 없어서 나무를 깎아서 겨를 묻혀서 불을 켜고 살았다고 한다.
물론 겨울을 나기 위해서 미리 나무도 많이 해 놓고, 먹을 것도 다 준비해 놓았다.
여름에는 살기가 매우 좋았다. 계곡이 깊고 커서 물이 좋아서 송어가 올 정도였다. 버드나무를 베어서 손가락만큼 굵은 걸로 결을 짜서 고기 발을 놔서 올라가는 고기들이 거기에 걸리는 데 그것을 잡아서 먹었다.
잔챙이들은 거기를 빠져 나가고 큰 놈들이 걸린다. 통발을 놔서도 잡기도 했다.
물론 겨울에도 소에 얼음구멍을 뚫고 자망을 쳐서 양쪽 구멍으로 빼놓으면 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었다. 그때는 먹는 것 걱정 없이 재밌게 살았다.
나는 1940년 가맛골에서 태어났는데 가맛골에서 살 때 기억나는 일은 로스케(러시아 군인)들이 삐딱한 배처럼 생긴 군모를 쓰고 붉은 말을 타고 총을 차고 두 명이 왔는데 부친에게 로스케 말로 뭐라고 지껄이더니 부친이 아무 대꾸도 없자 말에서 내려서는 부친의 귀싸대기를 한 대 갈기고는 돼지우리로 가서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옆구리에 끼고는 로스케 돈을 한 움큼 놓고 가버린 기억 딱 한 가지뿐이다.
이러한 가맛골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부친에게서 들은 것이다.
부친은 성격이 불같이 무섭고 대쪽같이 꼿꼿했다. 사람을 사귈 때에 한 번 거짓말한 것이 드러나면 다시는 그 사람과 상종을 안했다.
나에게도 정직하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셨고, 거짓말하면 무섭게 때려서 다시는 거짓말을 못하도록 하셨다.
나는 부친의 영향을 받아서 거짓말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내 자식들도 거짓말을 하면 절대 용서를 안 하고 매로 다르셨다.
부친은 동네에서 인기가 좋았다. 치과의사이니 동네 이웃들에게 치과 진료들 다 해주었다.
나도 중학교 다닐 때까지 동네 왕진 다닐 때 부친을 따라서 치과 진료를 도와준 기억이 있다.
부친은 나보고 치과의사가 되라고 했는데 의사가 되기는 되었지만 치과 진료가 싫어서 내과 쪽으로 공부했다.
부친은 1960년 8월에 60세로 돌아가셨다. 당시 나는 21살이었으며 군대에서 복무중이었다.
모친은 부친보다 훨씬 일찍 돌아가셨는데 해방 전 막내 동생 동철이를 낳은 지 일주일 만에 산후풍으로 돌아가셨다.
씨앗 준비하는 데 오래 걸렸다
북한을 탈출하려는 엄중한 일을 계획하는데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언제 탈출하면 좋을까 생각해 보니 부친의 말씀이 떠올랐다. “
너는 가을 용이니까(1940년 庚辰生) 가을에 일을 도모해야 일이 잘 된다. 가을에야 승천을 할 수 있어”라고 부친은 종종 내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래 가을에 탈출하는 거야.’ 이렇게 생각했다.
도망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먹고사는 식량이었다.
인도네시아에 가서 농사를 지어서 먹고살 계획이니까 씨앗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농사짓는데 필요한 농기구 즉 쟁기, 낫, 호미 등과 식량용 씨앗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데 북한은 여기처럼 씨앗을 종묘상에 가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협동조합에서 구해야 되기 때문에 쉽지는 않았다, 더욱이 의사가 개인 농사도 없는데 씨앗을 구해서 뭐하느냐고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모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병원에 오는 농촌 환자들에게 무슨 씨앗을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한 사람에게 많은 씨앗을 부탁하면 또 의심이 되니까 여러 사람한테 한두 가지씩 부탁을 함으로 의심을 사지 않도록 조심했다.
환자들은 별거 아니니까 “염려 마세요” 하고 다음에 검진 받으러 올 때 가지고 왔다.
거기다 담배씨도 모으고, 아편씨도 모았다. 아편씨는 여러 가지 치료약으로 쓸 수 있기 때문에 꼭 챙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런 사람은 이런 씨, 저런 사람은 저런 씨를 가져오게 했다. 거기다 꼭 필요한 아스피린, 다이아찐, 아편 등 다섯 가지 필수 재료를 챙겼다.
자루를 두 개 준비해서 같은 씨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를 잃어버려도 다른 하나만 있으면 되게끔 했다.
누구도 모르게 처음에는 혼자 했다. 바로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준비하는데 시간이 몇 년 지나니까 준비해 둔 씨도 오래 나두면 썩어서 싹이 안 날 수 있으므로 너무 오래 된 씨는 교체해서 다시 챙겼다.
씨앗을 챙기는 일이 상당히 오래 걸리고 어려웠다. 준비한 씨앗은 내 사무실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