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수천 리 떨어진 처갓집에서 장모님을 모시고 오다

집사람한테 북한의 배급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후 “이렇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유도 없는 데서 어떻게 살겠어? 이곳을 빨리 떠납시다” 하였다. 집사람은 “아니 당신! 여기 사람들 우리처럼 그런 사람들이 한두 명이에요? 그래도 모두 다 아무 말 안하고 잘 살고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당신보다 똑똑하지 못해서 그런 거예요. 그 사람들도 머리가 있고 외국 사정도 알고 그런 사람들인데…” 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고 우린 우리잖아.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해서 시도도 한번 안 해보고 포기할 수는 없는 거 아니야. 난 부아가 치밀어서 도저히 이곳에서 못 살겠단 말이야. 차라리 이렇게 살 바에는 일찍이 죽어버리는 게 낫지 이게 사람 사는 거야?”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후에도 몇 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집사람한테 탈북하자고 말했지만 집사람은 온 가족이 다 탈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보위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있는데 어떻게 탈출하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집사람과 나, 그리고 아이들 다섯 해서 우리 식구들이 일곱이고, 장모님과 처남 둘, 처제까지 해서 처가 식구가 넷이니 합이 11명이다.
11명을 끌고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 말이다. 더욱이 다 큰 어른들도 아니고 조무래기 아이들이 7명이나 되는데 이들을 다 데리고 탈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집사람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고생하시는 장모님
원래 처갓집은 평양이었다. 집사람과 결혼할 때만 해도 평양에 처가식구들이 살았는데 김일성이가 평양을 특별시로 만들다 보니까 평양에 있는 공장들을 다 지방으로 이주시켰다.
장인어른은 통신기술자인데 장인이 다니는 통신공장도 그때 평양에서 평안남도 용강으로 옮겨졌고 그에 따라 처갓집도 용강 근처 후산리로 이사를 갔다. 장인은 50대에 공장에서 공구를 갈다가 그라인다 돌이 튀어서 이마에 맞았는데 뇌를 다쳐서 돌아가셨다.
장인이 돌아가시자 장모님이 장인이 다니던 그 공장에 다녀야 배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공장에 다녔다. 북한에서는 사고로 빠진 가족 대신 충원을 하지 않으면 배급을 못 받아 굶어죽게 되어 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그것도 나이가 적지 않은 사람이 자식들 키우랴, 공장에 나가랴, 온갖 가정일을 다 하랴, 당에서 하는 노력동원에 참여하랴, 장모님이 얼마나 어렵게 살고 있는지 짐작은 되었지만 수천 리 떨어져 살다보니 마음뿐이지 도와줄 수도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런데 우연찮게 처갓집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어느 해 4월에 용강에서 의학학술회의가 열리는데 그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다. 집사람에게 “처갓집에 한번 들릴 거야”라는 말도 안하고 청진을 떠났다.
청진에서 평남 용강까지는 아마 서울에서 부산가는 거리의 3배 가량 될 것이다. 처갓집이 있는 후산리는 거기서 또 몇 십 리 더 들어가야 한다.
후산리는 남포 근방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당시는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승용차로 갈 수 있는 신분도 안 되었다. 장거리를 움직이려면 천상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
칙칙폭폭 연기를 내뿜고 다니는 증기기관차를 타고 한 이틀을 타고 가야만 처갓집에 도착할 수 있다.
단선 철도라 가다 서면 다른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끝이 없이 서있다. 어떤 때는 너무 지겨울 정도로 서있는 경우도 있다. 고개를 넘어갈 때는 사람 걸어가는 속도만큼 느릿느릿 간다.
꽥하고 연기를 품어댈 때면 시커먼 검댕이가 날아와 얼굴이고 와이셔츠고 뭇는다. 청진에서 평양까지 꼬박 하루 걸렸다. 학회 참석차 가는 길인데 검댕이로 와이셔츠가 얼룩져서 부득이 평양에 있는 누님 집에 들러서 와이셔츠를 빨아 입고 갔다.
누님 집 평양에서 용강까지 가는 데 또 하루가 걸렸다. 용강에서 후산리까지는 약 이십 리 거리인데 기차도 하루에 두 번 조석으로밖에 안 다니는 촌구석이다. 어떤 때는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그마저 안 다닐 때도 있어서 걸어가야 할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학술회의를 끝마치고 처갓집으로 가려는데 마침 후산리까지 가는 화물트럭이 있었다. 운이 좋았다. 울퉁불퉁한 소로(小路)를 따라 가면서 ‘이십 리를 여자 걸음에 걷자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장모님 고생이 많겠구나’ 생각했다.
처갓집에 오후 때쯤 도착했는데 부엌에 가마솥이 있기에 뭐 먹고 사시나 열어보니 얼어붙어서 솥이 안 열리는 것이었다. ‘아이고 세상에! 얼마나 추운데 불도 못 때고 사시는가 보다’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왔다.
방에 들어가 보니 처남 둘이 학교 갔다 와서 오들오들 떨고 앉아 있었다. ‘이거 안 되겠다. 여기 계시다가는 장모님 추위에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고생하시는 거 도무지 볼 수가 없다. 너무너무 불쌍해서 무조건 모시고 가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한참을 기다리니 장모님이 낯선 신발이 있는 것을 보고 문을 열고 들어오시면서 “누구 왔소?”라고 하였다. 사위 얼굴을 보더니 반가워하시면서 웃는 모습의 얼굴에 더 많은 주름살이 생겼다.
“장모님! 어째 이렇게 사십니까. 내 못 보겠습니다. 내일 퇴거를 할 테니 당장 청진으로 갑시다” 했다.
북한은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다
북한에서는 이사 가고 싶은 곳이 있더라도 마음대로 갈 수 없다. 청진시 같이 큰 대도시는 더군다나 잘 받아주지 않는다. 물론 평양은 특권층만 들어갈 수 있다. 이사를 하려면 먼저 이사 가려는 곳의 군(郡) 안전부(경찰서)에 허락을 받은 후 현 거주지 리위원장한테 퇴거 신청을 해야 한다.
또한 이사를 하려면 반드시 통행증이 있어야 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 이외에는 통행증이 없으면 못 다닌다. 군과 군 사이 왕래할 경우에 통행증이 있어야 한다.
나는 후산리위원장을 찾아가서 “청진의 안전부원들을 잘 알고 있으니 이사 허가를 받기는 쉽다. 그러니 통행증과 퇴거증을 떼어달라”고 말했다. 리당위원장은 그래도 떼어줄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용강군 의사들을 통해서 부탁을 하였더니 통행증을 받아서 퇴거를 할 수 있었다. 그들도 늘 의사들 신세지니까 부탁을 안 들어줄 수 없었던 모양이다.
퇴거하랴, 통행증 발급 받으랴 용강으로 걸어서 왔다갔다 하다보니까 회의 후 사흘 걸려서야 청진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때 큰처남이 중학교 1학년이었다.
큰처남이 한 보따리 걸머지고, 내가 한 보따리 들고, 작은 처남은 어린애라 그냥 걸리고 용강에서 무선 쪽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이틀 걸려서 청진으로 왔다. 청진에 도착하여 집에 들어가니 집사람이 친정어머니를 보고 깜짝 놀라는 거였다. “우리 어머이 아니요. 세상에 이게 어쩐 일이요. 어머이가 여길 다 오시다니…”
그렇게 하여 장모님과 처가식구들과 함께 좁은 우리 집에서 같이 3년을 살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