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조총련으로 보내주겠다고 큰 처남을

북조선으로 보내달라고 단식을 하는 큰처남을 달래서 죽을 먹인 다음에 통역관을 오라고 하였다.
그에게 “빨리 어디로 가든지 떠나야 할 텐데 큰일이다.
큰처남이 북조선으로 보내달라는 등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으니까 좀 의논을 해야 되겠다. 여기 간부들 좀 만나게 해달라”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보안청 과장이라는 자가 왔다. 보안청 과장이라면 그 권한이 아주 큰 사람이다.
보안청은 자위대를 총괄하는 기관으로서 한국의 국방부에 해당하므로 국방부 과장이 왔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나는 보안청 과장에게 “큰처남이 북조선으로 보내달라고 떼를 쓰고 하니 빨리 어디로든지 가야 되겠다”며 이런 사정을 말하니 그는 “알았다. 청장님과 의논해 보겠다”며 돌아갔다.
(김만철 씨가 일본에 들어가자 외교적으로 복잡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이에 대한 기사가 있어 소개한다. 편집자 주)
전두환 대통령, “김씨일가를 무조건 데려오라”
한편 일본정부는 김만철 일가가 망명신청을 하자 외교적으로 골치 아픈 ‘불청객’을 떠안은 셈이었다.
이들의 망명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한국과 북한, 일본 사이에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 뻔했다.
문제의 핵심은 망명처였다.
해상보안청이 청진호를 인근 쓰루가(敦賀) 항으로 예인한 뒤 벌인 1차 조사에서는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고 싶다’는 애매한 대답만이 돌아왔다.
사실 ‘정답’은 있을 수 없었다. 따뜻한 남쪽 나라가 어디인지에 대해 가족들마다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서는 말 못할 고민이 있었다.
당시 일본 어선 후지산마루호 선장이 불법어로 혐의로 북한에 억류 중이어서 북ㆍ일 관계는 미묘한 국면에 놓여 있었다.
일본이 이들 탈북자의 한국 망명에 적극 나선다면 북한을 ‘자극’해 불행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한국과의 관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당시 한일관계는 최고의 밀월을 구가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범한 양국 정부는 1983년 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의 방한과 1984년 9월 전두환 대통령의 일본 답방을 거치면서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일본 외무성 측에서 김씨 일가족이 발견된 다음날 주일 한국대사관에 이들의 한국 망명의사 확인을 위한 면담을 해보라고 연락을 해온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다.
그때 주일 한국대사관에는 ‘특명’이 떨어졌다. 김씨 일가를 즉각 국내로 오게 하라는 긴급 훈령이 떨어진 것이다.
당시 외무부는 이규호 대사에게 보낸 훈령에서 한국망명 의사가 확인될 경우 결코 북한으로 송환돼서는 안되며 꼭 한국으로 보내져야 한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일본측에 전달토록 지시했다.
당시 정부가 김씨 일가의 한국행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체제안보와 국내정치적 측면에서 ‘김만철 탈출극’의 활용가치가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우선 남북이 대결하는 상황에서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소재’로서 안성맞춤이었다.
또 국내 정치적인 분위기를 일거에 바꿀 수 있는 모멘텀이기도 했다.
김씨 일가가 일본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1월 19일 발생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만철 일가 탈출은 ‘고문치사 정국’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기회였다.
대사관 측은 1월 22일 일본 정부에 김씨 일가의 한국 망명을 공식 요청했고, 이규호 주일 대사와 이기주 공사 등 대사관의 정무ㆍ정보 라인이 총동원돼 일본과의 교섭업무에 착수했다.
교섭의 중심은 외교부 내 대표적 일본통(通)으로 꼽히는 이재춘 정무참사관이 맡았다.
특히 전두환 대통령은 이규호 주일대사를 통해 김씨 일가의 한국 망명에 협조를 요청하는 친서를 나카소네 일본 총리에게 전달했다.
김씨 일가의 망명 사건이 한일 양국의 정상 간 교섭대상으로 격상된 셈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월 30일 밤 김창석 주나고야 총영사가 이끄는 면접팀이 일본 정부의 주선 하에 김씨 일가족을 만났다.
표면상으로는 의사 확인을 위한 면담이었지만, 사실상 김씨 일가에게 한국행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면담은 조총련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바다 위의 해상보안청 순시선에서 이뤄졌다.
밤 10시께 시작된 면담은 이튿날 새벽 3시까지 계속됐다. 면접팀은 김만철 일가에게 한국행을 택할 경우 받게 될 정착금과 직장 교육 등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이재춘 참사관은 당시 면접팀에게 한국은 누구나 노력한 만큼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사회라는 점을 강조하라고 주문했다.
“공해상으로 강제추방하면 어떨까”
그러나 5시간여에 걸친 설득에도 일가족의 의견은 쉽게 교통 정리되지 않았다. 김만철씨 본인은 한국행을 원했지만 김씨의 장모와 처남 등은 호주나 뉴질랜드 등 제3국행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국으로 갈 경우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처형당할 위험이 있고, 북측이 향후 한국으로 첩자를 보내 보복할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리는 눈치였다.
일부는 북한에서 받은 사상 교육 탓에 ‘남조선은 거지들이 득시글거리는 생지옥’이라는 편견도 갖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본 정부의 고민이 깊어졌다. 한국으로 이들을 직접 보내면 북한이 반발할 테고 호주 등 제
3국으로 보냈다가는 한국의 불만을 살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일본이 그대로 떠안고 있자니 제2, 제3의 김만철 행렬이 줄을 이을 것이 자명했다.
이리저리 궁리를 하던 일본 외무성은 이튿날 이재춘 참사관을 불러 ‘은밀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일본 정부가 김만철씨 일가족을 불법입국 혐의로 공해상에 강제 추방하는 형태가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외형상으로는 강제추방이었지만 실제로는 청진호를 공해상에 ‘의도적으로’ 표류시켜 부산 근처의 한일 인접수역으로 유도한 뒤 대기 중이던 우리 측 함정이 이를 인수하는 구상이었다.
‘물길’을 자연스럽게 이용해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 한국에 탈북자들을 넘기는 외교적 해법인 셈이다.
외무성 측은 청진호의 주요 통과 해역을 표시한 해도와 한국 해역 도달 예상 일시까지 주일 한국대사관에 상세히 알려줬다. 계획대로 ‘인수인계’가 이뤄진다면 이번 사건은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었다.*
출처 [연합뉴스 2011-11-07 <외교열전> “김만철 일가를 데려와라” 삼각 외교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