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대만으로 가려고 헬기장으로 갔는데

빨리 떠나야겠다는 내 말을 듣고 보안청장과 상의를 하겠다고 돌아갔던 보안청 과장이 저녁 때에 다시 와서는 “어디로 갈 것이냐?” 물으며 가고 싶은 나라를 체크하라고 종이에 미국, 한국, 그리고 일본 등을 적어 온 것을 보여주며 “가고 싶은 곳을 적으라”고 했다.
그래서 빨간 연필 가져오라고 해서 대한민국을 제일 먼저 쭉 지워버렸다.
그리고 “미국도 일본도 안 된다.
나머지는 어디든 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결정을 못 하겠다”고 하니까 보안청 과장은 “그러면 정부하고 다 얘기 된 거니까 대만에 가서 석 달 체류하면서 다시 천천히 생각해 봐라.
그런 후에 가고 싶은 나라 이름을 적어라.
내일 모레 새벽에 헬기 타고 여기를 떠날 것이다.
군비행장에 가서 속력 빠른 비행기를 타고 가기로 하였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큰처남이 “조총련에 언제쯤 가겠음매”하며 자꾸 채근하는 것이었다.
“사흘 기다리라고 했잖아. 좀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고 우리가 떠날 날짜에 하루 보태서 말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 새벽 한 두시쯤 됐을 때 군인들이 비상소집해서 우리에게 몰려와서는 빨리 떠나야 된다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많은 군인들이 몰려와서 그러니까 큰처남은 조총련으로 간다고 생각했는지 정신이 없는 가운데 군인들이 안내하는 배 위에 헬기장으로 갔다. 군인들은 우리 가족을 한 사람씩 부축해서 데려갔다.
그리고는 “빨리 타십시오” 하니까 큰처남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헬기에 올라탔다.
(김만철 일가의 탈출 사건에 관계된 한국과 일본, 그리고 대만 사이의 외교전이 벌어졌을 당시 그 상황에 대하여 보도된 기사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한편 김만철 일가를 공해상에서 접수하기로 일본 외무성과 합의를 본 이재춘 참사관은 즉각 외무부 본부에 협의결과를 전문 보고하고 “구체적인 인수지점과 일시는 직접 보고하겠다”고 했다.
전화로 보고했다가는 북한에 의해 도청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부로부터 귀국 지시가 떨어지자 이 참사관은 2월1일 아침 부인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행 첫 비행기에 올랐다.
이 참사관이 서울에 도착하자 최광수 외무부 장관은 그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도착한 곳은 청와대 바로 옆의 ‘궁정동 안가’였다. 그곳에는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력자인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과 이기백 국방부 장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자복 합참의장과 최상화 해군 참모총장, 김인기 공군참모총장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속속 도착했다.
이 참사관은 국가보안 당국의 수뇌부 앞에서 약 20분간 일본 측과의 교섭 내용을 브리핑했다.
브리핑 중간 중간 장세동 부장은 세세한 부분까지 질문을 던졌고, 그때그때 필요한 조치를 직통전화로 군 수뇌들에게 직접 지시했다.
그날 궁정동 안가 회의는 김만철씨 일가를 인수하기 위한 사실상의 ‘군사작전’이 논의됐던 것이었다.
북한은 북한대로 김만철 일가의 한국 망명만큼은 저지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탓에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경우에 따라 전쟁 상황도 상정하는 분위기였다. 이 참사관은 그날 회의를 마치고 밤늦게 일본으로 돌아왔다.
당시 안가 회의 결과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즉각 전군에는 비상경계령이 발동됐다.
그러나 이튿날인 2월2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 참사관을 외무성으로 불러들인 후지타 기미오(藤田公郎) 외무성 아시아 국장이 김만철 일가의 추방계획 백지화를 통보한 것이다.
청진호가 너무 낡고 엔진도 못 쓰게 돼 더 이상 항해를 계속할 수 없게 됐다는 이유였다.
석연치 않은 설명에 이 참사관은 “외무성이 한다는 일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까?”라고 강력히 항의했지만 “정말 미안하게 됐다”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물증은 없었지만 북한에 억류 중인 후지산마루호 선장에 대한 북측의 살해 위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주일 대사관은 북한이 한일간의 ‘공해상 추방계획’을 눈치 채고 후지산마루호 선장에 대한 살해 위협을 가한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판단하고 이를 본부에 보고했다.
한일 간에는 냉랭한 기류가 감돌기 시작했다.
김씨 일가를 한국으로 데려가기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는가 싶은 순간 ‘대만행(行)’이라는 새로운 해법이 등장했다.
당시 대만은 일본과 수교하지 않았지만, 한국과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일단 김씨 일가를 대만으로 보냈다가 일정기간 이후 한국으로 송환하는 우회적 방법을 쓰자는 구상이었다.
일본은 우리 정부 고위층과 친한 한 ‘막후인사’를 통해 김씨 일행이 대만으로 갈 수 있도록 대만과의 교섭을 우리 정부가 맡아주기를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가의 사람들’(노진환 저)에 따르면 이 막후인사는 나카소네 수상의 정치 자문역을 맡고 있던 세지마 류조(瀨島龍三) 전 이토추 종합상사 회장이었다.
한일 외교사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막후에서 조정 역할을 한 세지마는 베스트셀러 소설 ‘불모지대’의 주인공인 이키 타다시(壹岐正)의 실제 인물로도 유명하다.
어쨌든 정부는 고위층의 지시를 받아 곧바로 대만과의 교섭에 돌입했고 김씨 일가의 망명을 둘러싼 한ㆍ대만 간의 불꽃 튀는 밀고 당기기가 시작됐다.
최광수 외무장관은 추견(鄒堅) 주한 대만대사와 은밀히 접촉해 김씨 일가의 대만행 허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대만 측은 이를 즉각 거부했다.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정부는 김씨 일가가 대만에 도착하면 가능한 한 이른 시일 내에 한국으로 데려오겠다며 설득에 총력을 기울였다.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 신 전 대사와 박수길 외무부 차관보 등이 대만에 급파됐고, 정일권 전 국회의장 등
전직 고위관리들도 총동원돼 장징궈(蔣經國) 대만 총통을 비롯한 고위 관리들에게 전화 공세를 펼쳤다.
우리 측의 전방위적인 설득에 대만 정부는 결국 입장을 선회했다.
김씨 일가의 대만 체류기간을 최대한 단축한다면 대만행을 허용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내보인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김씨 일가가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으로 보내지면 북한으로부터 ‘짜고 쳤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했지만, 이미 교섭은 한국과 대만 손에 넘어와 있는 상태였다.
드디어 2월7일 밤, 김씨 일가족의 극비 이송작전이 시작됐다.
밤 11시께 김씨 일가 11명을 태우고 공군기지를 이륙한 일본 자위대의 YS-11기는 이튿날 새벽 0시25분께 타이베이의 중정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김씨 일가는 타이베이 교외의 특수기관 전용 초대소로 옮겨 20여 시간을 머문 뒤 2월8일 저녁 8시30분께 대한항공 727기에 탑승해 약 2시간 뒤 한국땅을 밟았다.
그 과정은 그야말로 ‘전광석화’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김씨 일가족의 망명극은 24일 만에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연합뉴스 2011-11-07 <외교열전> “김만철 일가를 데려와라” 삼각 외교전]
